요즘 뭘 보고 있냐면
문피아에서 동시에 따라가고 있는 여섯 편을 정리합니다. 새 작품을 찾고 계신 분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한 명의 독자로서 실제로 읽으며 든 생각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정리해놓고 보니 여섯 중 다섯이 현대판타지였습니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마지막에 적어두겠습니다.
별 그리는 그림 천재 — 능력자물이 아니다
세 살부터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성장기입니다. 판타지 요소는 전생에 화가였던 존재가 아이 곁에서 성장을 돕는다는 설정 하나예요.
이 작품이 좋은 건 능력자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압도적 재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보다, 그 재능을 알아본 어른들이 각자의 상처를 안고 아이를 지키려는 쪽에 훨씬 많은 지면을 씁니다.
미술의 기술적인 부분도 꽤 성실하게 다뤄요. 저는 미술을 잘 모르는데도 읽으면서 배우는 게 있었습니다. 여섯 중 가장 문학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아내가 무림공적이었다 — 제목이 절반만 맞다
여섯 중 유일한 무협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소중해요.
제목만 보면 아내의 정체가 밝혀지는 이야기 같은데, 읽어보면 남편 쪽이 진짜 축입니다. 남편도 기억을 잃은 상태고, 아내를 찾아가는 과정이 곧 자기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 됩니다. 제목과 본문의 무게중심이 어긋나 있어서, 나중에 제목이 바뀌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봅니다.
전개가 빠른 편이라 붙잡고 읽기 좋습니다.
임신한 여자친구가 재벌가 늦둥이 딸이라니 — 제목이 시놉시스인 경우
제목이 다 말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 중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주인공 남자 쪽의 능력, 그러니까 비정상적으로 예리한 직감이 이야기를 끌고 가요.
신분 역전물의 통쾌함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 회 한 회 판단이 쌓이면서 신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큽니다.
절대은신으로 신화급 탑 공략 — 한 가지 능력으로 끝까지 간다
'절대 은신'이라는 압도적인 능력 하나를 무리 없이 끝까지 밀고 갑니다.
저는 이런 구조를 좋아합니다. 능력이 하나면 작가가 상황을 계속 새로 설계해야 하거든요. 매번 다른 국면에서 은신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여줘야 하니까요. 능력을 계속 추가하는 작품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방식입니다.
먼치킨이면서도 못하는 게 분명히 있어서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도 좋습니다.
무림맹 고문기술자는 경찰이 너무 쉽다 — 무대를 옮기면 능력이 재해석된다
무림맹의 고문기술자가 현대 경찰로 환생합니다. 무협에서는 어두운 기술이었던 것이 현대 수사물에서는 통쾌한 도구가 돼요.
이게 환생물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 자체보다 그 능력이 어느 무대에 놓이는가가 이야기를 만듭니다. 같은 기술이 무대에 따라 악행도 되고 정의도 되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사천당가의 검은머리 CIA 요원 — 같은 장치, 다른 결과
사천당가의 전생을 가진 인물이 현대 CIA 요원으로 활동합니다. 위 작품과 장치는 거의 같은데 결과물은 전혀 다릅니다.
독과 암기라는 당가의 특기가 첩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번역되는지 보는 재미가 있어요. 처음부터 강한데도 계속 강해지는 구조라, 뒤가 더 기대되는 쪽입니다.
다섯이 현대판타지라는 사실에 대하여
정리하고 나서 좀 씁쓸했습니다. 여섯 중 다섯이 현대판타지예요.
재미없어서 안 읽는 게 아닙니다. 새로 나오는 정통 무협·판타지가 별로 없어서 못 읽는 겁니다. 군림천하나 독보건곤 같은 무게의 무협, 드래곤 라자 같은 밀도의 판타지가 요즘 잘 나오지 않아요.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회차 단위로 소비되는 시장에서 느린 축적은 살아남기 어렵거든요. 첫 회에 붙잡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이 구조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
제 결론
현대판타지의 빠른 호흡과 명확한 보상은 분명한 미덕입니다. 저도 매일 그걸 즐기고 있고요.
다만 두 종류가 같이 살아 있는 시장이면 좋겠다는 바람은 접지 못하겠습니다. 빠른 것만 남으면 결국 천천히 쌓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자리가 통째로 사라지거든요. 그 자리가 그리워서 자꾸 옛 작품을 다시 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