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작했나
판타지와 무협을 오래 읽다 보면 머릿속이 헝클어집니다. 작품마다 마법 체계가 다르고, 무공 등급이 다르고,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씁니다.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게 돼요.
그 답답함에서 시작했습니다. 세계관 카테고리 하나 만들고 시작한 게 1년이 지나 1,400개 항목이 됐어요. 잘한 것보다 틀린 게 훨씬 많았고, 그 틀린 것들이 더 쓸모 있을 것 같아 적어둡니다.
크게 틀린 것 1 — 분류를 나중에 정했다
가장 크게 치른 수업료입니다. 항목을 100개쯤 만든 뒤에야 분류 체계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갈아엎었습니다. 두 번.
분류를 바꾸면 그냥 폴더를 옮기는 게 아닙니다. 항목 간 링크가 깨지고, 상위 문서의 설명이 안 맞게 되고, 이미 쓴 본문이 새 분류와 어긋납니다. 100개를 옮기는 데 100개를 새로 쓰는 것보다 오래 걸렸어요.
지금이라면 항목 10개쯤에서 분류를 확정하겠습니다. 그때는 아직 버릴 게 없거든요. 완벽한 분류를 찾으려고 미루는 게 최악입니다. 어차피 완벽한 분류는 없고, 빨리 정한 뒤 그 안에서 버티는 게 낫습니다.
크게 틀린 것 2 — 본문을 짧게 썼다
"일단 항목 수를 채우고 본문은 나중에 채우자"고 생각했습니다. 항목당 두세 문장씩 넣고 빠르게 늘렸어요.
그러자 두 가지가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첫째, 항목이 많아질수록 서로 구분이 안 됐습니다. 종족 60개가 다 비슷해 보이면 60개가 있는 의미가 없어요. 위키의 가치는 항목 수가 아니라 항목 간 차이에서 나옵니다.
둘째, 검색 노출이 전혀 안 됐습니다. 두 문장짜리 페이지를 구글이 좋아할 이유가 없죠. 결국 전부 다시 채웠습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분류는 데이터 우선, 본문은 깊이 우선. 뼈대는 빨리 넓게 세우되, 본문은 한 항목씩 제대로 채우고 넘어가는 게 결국 빠릅니다.
크게 틀린 것 3 — AI에 초안을 맡기고 그대로 뒀다
1,400개를 손으로 다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AI 없이는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그건 인정합니다.
문제는 초안을 초안으로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럴듯하게 나오니까 손을 덜 댔고, 그렇게 쌓인 페이지들이 서서히 서로 닮아갔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수백 개 항목이 같은 문장 틀에서 찍혀 나오고 있었어요. 심지어 제가 쓴 칼럼들조차 특정 단어 하나를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AI가 진짜 못하는 건 지식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100개 항목을 주면 100개를 비슷하게 써요. 그걸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을 미루면 미룰수록 비용이 커집니다.
해보고 알게 된 것 — 원작과 위키는 다른 물건이다
작품을 읽는 방식과 위키를 정리하는 방식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작품은 시간순, 인물 중심으로 흐릅니다. 한 사람을 따라가면서 세계를 알게 되죠.
위키는 분류순, 시스템 중심으로 놓입니다. 시스템을 먼저 놓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합니다.
그래서 작품의 감동을 위키로 옮기려 하면 대체로 실패합니다. 감동은 시간 순서에서 나오는데 위키에는 시간이 없거든요. 이걸 인정하고 나서 작품 페이지와 설정 페이지를 아예 분리했습니다. 작품의 결은 작품 문서에서 다루고, 시스템은 카테고리 문서에서 다루는 식으로요.
해보고 알게 된 것 — 좋아하는 것부터 써야 살아남는다
1년을 버틴 힘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항목부터 썼기 때문이에요.
의무감으로 쓴 페이지는 지금 봐도 재미가 없고, 재미있어서 쓴 페이지는 지금 봐도 잘 읽힙니다. 그리고 후자가 검색에서도 더 잘 걸립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로 겪어보기 전에는 잘 안 믿게 돼요.
위키는 결국 오래 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러니 오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굴리는 게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결론 — 세 줄
분류는 일찍 정하고 버틸 것. 본문은 처음부터 제대로 쓸 것. AI는 초안까지만 시키고 차이는 직접 만들 것.
이 셋을 처음부터 지켰다면 지금의 절반쯤 되는 시간에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그러지 못했으니 대신 이 글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