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출발선, 정반대의 도착지
〈드래곤 라자〉의 후치 네드발과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배긴스는 출발점이 거의 같습니다. 시골 청년과 호빗. 둘 다 영웅이 될 자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고, 그런데도 세계의 무게를 떠안게 됩니다.
판타지에서 이건 흔한 설정이에요. 선택받지 못한 자가 선택된다는 구조는 장르의 기본 문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두 작품이 이 사람을 데려가는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 지점이 한국 판타지와 서양 판타지가 갈라지는 자리를 꽤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후치 — 끝까지 마을 청년으로 남는다
후치는 거대한 사건에 계속 휘말리는데도, 세계를 보는 눈높이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습니다.
용과 마법사와 왕족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후치의 시선은 여전히 헬턴트 마을 청년의 시선입니다. 대단한 존재를 만나면 대단하다고 놀라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고, 이해가 안 되면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 농담을 합니다. 이 농담이 중요해요. 상황이 무거워질수록 후치는 더 수다스러워지는데, 그게 이 인물이 세계에 잡아먹히지 않는 방식입니다.
'드래곤 라자'라는 칭호를 받은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은 거창해졌는데 사람은 그대로예요. 저는 이게 이 작품이 던지는 답이라고 봅니다. 운명을 짊어져도 사람이 바뀔 필요는 없다.
프로도 — 무게가 사람을 갉아먹는다
프로도는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샤이어를 떠날 때의 프로도와 운명의 산에 도착한 프로도는 사실상 다른 사람이에요.
반지는 프로도를 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계속 깎아냅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샘조차 믿지 못하게 되고, 웃음을 잃습니다. 톨킨은 이 마모를 아주 천천히, 거의 잔인할 만큼 꼼꼼하게 그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프로도는 반지를 던지지 못합니다. 이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실패합니다. 반지가 파괴되는 건 골룸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지 프로도가 이겨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프로도는 돌아와도 돌아온 게 아닙니다. 샤이어는 회복되는데 프로도만 회복되지 않고, 결국 회색항구에서 배를 탑니다. 세계를 구한 사람이 그 세계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결말이에요.
왜 이 차이가 생겼을까
두 작품이 이렇게 갈린 이유를 저는 무엇을 위로하려 했는가의 차이로 읽습니다.
톨킨은 1차대전 참전자였고, 친구 대부분을 솜 전투에서 잃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마모는 참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겪은 것과 겹칩니다. 살아 돌아왔지만 예전 사람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 — 지금은 외상 후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그것을 톨킨은 프로도에게 얹었습니다. 이 작품이 위로하려는 대상은 돌아왔지만 회복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영도는 1998년 PC통신 연재로 이 작품을 썼습니다. 훨씬 젊고, 훨씬 가볍고, 훨씬 말이 많은 세계예요. 〈드래곤 라자〉가 위로하는 대상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해지지 않아도 네 자리는 있다 — 열일곱 살 화자를 끝까지 열일곱 살로 두는 선택은 그래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같은 구조가 반복되는 다른 작품들
이 두 방향은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보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는 후치 쪽입니다. 이름을 빼앗기고도 끝내 되찾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 원래의 아이로 살아갑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회복하면서 끝납니다.
호빗의 빌보는 프로도 쪽에 가깝습니다. 모험에서 돌아온 빌보는 샤이어에서 계속 겉돌고, 결국 반지에 붙들린 채 늙어갑니다. 다만 프로도만큼 파괴되지는 않아요. 톨킨이 같은 구조를 두 세대에 걸쳐 강도를 올리며 반복한 셈입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이야기인가
솔직히 작품의 무게로 따지면 프로도 쪽이 더 깊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을 끝내 실패시키고, 구원의 공로를 골룸에게 넘기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퇴장시키는 선택은 아무나 못 합니다. 그건 용기 있는 결말이에요.
그런데도 제가 더 자주 다시 펴는 쪽은 후치입니다. 대단한 일에 휘말리고도 여전히 시시한 농담을 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어떤 종류의 안심이 됩니다. 세상이 나를 갈아넣더라도 나는 나로 남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려서요.
제 결론
평범한 사람에게 거대한 운명을 얹는 이야기는 결국 두 갈래 중 하나로 갑니다. 그 사람을 지켜내거나, 그 사람이 부서지는 걸 지켜보거나.
어느 쪽이 옳은 답인지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쪽이 있을 뿐이에요. 버텨야 할 때는 후치를, 이미 부서진 뒤라면 프로도를 읽게 되더라고요. 두 작품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사람에게 두 시기가 다 오기 때문일 겁니다.
〈드래곤 라자〉가 한국 판타지에 남긴 것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