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기 — 가장 강한데 가장 우유부단한 주인공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김용 주인공 중 무공으로는 최상위인데, 결정 앞에서는 끝없이 망설입니다. 처음엔 답답했는데 다시 읽으니 알겠더군요. 김용은 영웅을 그린 게 아니라 영웅이기를 거부한 사람을 그렸습니다.

답답한 주인공

김용의 주인공들은 성격이 뚜렷합니다. 사조영웅전의 곽정은 우직하고, 신조협려의 양과는 격정적이고, 천룡팔부의 교봉은 비극을 정면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다릅니다. 솔직히 말해 우유부단합니다. 처음 읽었을 때 저는 계속 답답했어요. "이 사람이 정말 주인공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흔들림이 이 작품의 전부더군요.

능력과 결단력은 별개다

장무기는 무공으로는 김용 주인공 중에서도 최상위입니다. 구양신공을 익혔고, 건곤대나이를 익혔고, 태극권까지 배웠어요. 명교 광명정에서 육대문파를 혼자 상대해냅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은 하나도 결정하지 못합니다. 명교 교주 자리를 계속 부담스러워하고, 사랑 앞에서 끝없이 미루고, 천하의 향방이 걸린 결정 앞에서 남의 말을 따릅니다.

이 모순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강한 사람은 결단력도 있을 것이라고 무심코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자기 인생 앞에서는 한없이 흔들리는 걸 우리는 주변에서 늘 봅니다. 김용은 그걸 무협 주인공에게 얹었어요.

네 여인 —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의 초상

장무기 주변에는 네 여인이 있습니다. 각자 그를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겨요.

조민은 원나라 군주의 딸입니다. 영리하고 도발적이고, 장무기를 가장 자주 흔듭니다. 주지약은 아미파의 후예로, 처음의 순수함이 점점 어둠으로 기울어가는 인물이에요. 은리는 그의 표매(사촌)로, 가족애와 연정이 뒤엉킨 자리에 서 있습니다. 소소는 페르시아 명교와 얽힌 인물로, 결국 총교의 성녀가 되어 장무기 곁을 떠납니다.

중요한 건 장무기가 이 넷 사이에서 끝까지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곽정과 황용처럼 한 사람을 향해 곧게 가는 서사가 아니에요. 미루고, 상처 주고, 미안해하고, 또 미룹니다. 한심해 보이지만 사람은 원래 그렇게 굽니다.

교주 자리를 떠넘기려는 사람

명교 교주가 된 뒤에도 장무기는 그 자리를 계속 어색해합니다. 양소에게 넘기려 하고, 실무를 미루고,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해요.

다른 김용 주인공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이상한지 보입니다. 곽정은 양양성을 지키다 죽습니다. 양과는 마지막에 강호를 돕습니다. 교봉은 자기 목숨을 던져 두 나라의 전쟁을 막아요. 전부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킵니다.

장무기는 마지막에 그냥 떠납니다. 천하도, 교주 자리도, 사문의 기대도 전부 두고 조민과 함께 사라져요. 남은 생을 조용히 살겠다면서.

영웅이기를 거부한 사람

이 결말에 저는 처음에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김용이 쓴 가장 대담한 결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다른 무협은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씁니다. 이 작품은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되지 않기로 한 사람을 씁니다. 힘이 없어서 못 한 게 아니에요. 힘은 넘치는데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게 무책임인지 용기인지는 독자마다 다르게 볼 겁니다. 저는 용기 쪽으로 읽어요. 세상이 당신에게 영웅이 되라고 할 때 거절하는 건, 사실 영웅이 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제 결론

저는 곽정이나 교봉보다 장무기를 좋아합니다. 강한데 흔들린다는 게 훨씬 사람 같아서요.

김용 입문작으로는 대개 사조영웅전을 권하지만, 영웅담보다 사람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면 의천도룡기부터 읽어도 좋다고 봅니다. 답답하다는 첫인상을 넘기고 나면, 김용이 왜 이 주인공을 이렇게 그렸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김용과 용대운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는 따로 정리한 글에 적어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