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물인데 왜 답답하지 않은가
무협 웹소설을 오래 읽다 보면 회귀물에 한 번은 지칩니다. 주인공이 전생의 기억을 들고 돌아와 모든 걸 미리 아는데, 정작 읽는 사람은 그 아는 것이 하나씩 확인되는 과정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답을 든 사람이 답을 맞히는 걸 지켜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화산귀환은 그 답답함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이걸 회귀를 치트가 아니라 부채로 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정리해봤습니다.
기억은 전생의 것인데 몸은 소년의 것
주인공 청명은 전생에 천하오절의 한 자리를 차지한 매화검존이었습니다. 천마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함께 죽었고, 100년이 지나 몰락한 화산파의 막내 제자로 눈을 뜹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회귀물과 갈라집니다. 보통은 기억이 곧 우위입니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고, 누가 배신할지 알고, 그래서 남보다 빨리 갑니다. 그런데 청명은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가 벌어져 있습니다. 손이 기억을 못 따라갑니다. 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몸이 아닌 머리가 알고, 그 사이의 간격이 곧 이야기의 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한 수 한 수 다시 쌓는 과정이 지루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갈등 자체가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수가 터질 때 시원한 이유도 여기 있어요. 그게 쌓아온 것의 결과지 주어진 것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산이라는 무대를 고른 것이 절반
무대 선택도 크다고 봅니다. 청명이 돌아온 곳은 잘나가는 문파가 아니라 삼류로 굴러떨어진 화산파입니다.
개인의 복수를 목표로 삼으면 이야기는 목표를 이루는 순간 소진됩니다. 그런데 문파를 다시 세우는 일은 끝이 잘 안 납니다. 제자를 가르치고, 이름을 되찾고, 정파의 한 축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계단처럼 이어지거든요. 주인공 하나가 강해지는 속도보다 이야기가 자랄 자리가 더 넓습니다.
정파의 위선을 까는 대목이 통쾌한 것도 이 무대 덕입니다. 바닥에서 올라온 문파의 시선이라 명분을 앞세우는 쪽을 비틀 자격이 생깁니다.
동료가 배경으로 쓰이지 않는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사실 청명이 아니라 그 주변입니다. 백전·유이설·조걸·윤종 같은 동문들이 같이 자랍니다.
전생의 청명은 고독한 정점이었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같이 사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웁니다. 사형제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대목이 웃기고,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지키는 장면에서는 뭉클합니다. 동료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만 쓰이지 않아요.
이게 이른바 먹방식 전개와 갈리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만 강해지는 이야기는 강해질수록 외로워지고, 외로워질수록 읽는 재미가 줄거든요.
그래도 장르가 치르는 값은 있다
칭찬만 적으면 정직하지 않으니 하나 남깁니다. 회귀물은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팝니다. 독자는 이 사람이 결국 해낼 걸 압니다. 그 안정감이 편안함인 동시에 긴장의 손해예요.
화산귀환은 승부의 축을 개인의 승패에서 문파의 회복으로 옮겨 이걸 상당 부분 버팁니다. 청명이 이기느냐가 아니라 화산이 어디까지 돌아오느냐가 궁금해지니까요. 그래도 뒤로 갈수록 '질 리 없다'는 감각은 남습니다. 저는 이걸 작품의 흠이라기보다 회귀물이라는 장르가 지불하는 값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