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신화에서 무엇을 가져갔나 — 이름을 빌릴 때와 구조를 빌릴 때

엘프와 드워프는 북유럽에서, 영웅 서사는 그리스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 이미지는 대체로 20세기 창작입니다. 신화를 빌리는 두 가지 방식과 그 차이를 정리했습니다.

대부분은 빌려 온 것이다

판타지 설정을 오래 정리하다 보면 불편한 사실 하나를 인정하게 됩니다. 거의 전부가 남의 이야기에서 왔다는 것.

엘프와 드워프북유럽 전승에서, 영웅의 여정과 신탁은 그리스에서, 요정과 이계의 감각은 켈트에서, 도술과 요괴는 동아시아에서 왔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알고 빌리는 것과 모르고 빌리는 것의 차이가 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아는 엘프는 신화의 엘프가 아니다

가장 먼저 걸리는 게 이겁니다. 지금 떠올리는 엘프 — 뾰족한 귀, 활, 숲, 장수, 우아함 — 는 전승 속 존재와 상당히 다릅니다.

북유럽 전승의 엘프는 훨씬 모호하고 지역마다 성격이 달랐어요. 지금의 이미지는 20세기 판타지 문학과 그 뒤를 이은 게임이 다듬어 만든 것에 가깝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그 결정적 계기였다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로도스도 전기 같은 작품을 거치며 지금 형태로 굳었죠.

그러니 "엘프는 원래 이렇다"고 말할 때, 그 '원래'가 어느 시점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는 신화가 아니라 우리보다 겨우 몇십 년 앞선 창작입니다.

이름을 빌리면 얕아진다

신화를 가져오는 방식은 크게 둘이라고 봅니다. 이름을 빌리는 것과 구조를 빌리는 것.

이름 차용은 쉽습니다. 신의 이름을 붙이면 즉시 무게가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이게 가장 얕은 사용이기도 합니다. 원전의 성격과 작중 행동이 어긋나면 아는 독자가 먼저 이탈합니다. 하데스를 그냥 악역으로 쓰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전승 속 하데스는 오히려 규칙을 가장 잘 지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구조를 빌리면 깊어진다

반대로 구조를 빌리면 이름을 안 써도 됩니다.

오딘이 지혜를 얻으려 눈을 내줬다는 이야기에서 가져올 것은 '오딘'이 아니라 얻으려면 내준다는 문법입니다. 이 문법만 세계에 심어 두면, 신화 이름을 하나도 안 써도 그 세계는 북유럽적인 결을 갖습니다.

북유럽 신화에서 제가 가장 값지다고 보는 것도 종족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신들이 자기 최후를 알면서도 그날을 향해 갑니다. 판타지에서 예언이나 정해진 운명을 다룰 때 이 태도를 빌려 오면 이야기가 깊어져요. 운명을 피하려는 이야기는 흔한데, 받아들이고 그날까지 무엇을 할지 정하는 이야기는 드물거든요.

한국 판타지가 만든 것도 있다

빌린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소드마스터가 좋은 예입니다.

영어 단어를 조합했지만 지금의 의미는 영어권 판타지에 없습니다. 서양 판타지에는 마법사의 위계(서클)에 대응하는 검사의 위계가 뚜렷하지 않았거든요. 기사는 신분이지 강함의 단계가 아니었으니까요.

드래곤 라자 이후 한국 판타지가 마법사와 검사를 나란히 성장시키는 구조를 즐겨 쓰면서, 검사 쪽에도 눈에 보이는 계단이 필요해졌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우며 굳어진 게 소드마스터와 오러 블레이드라고 보는 설명이 일반적입니다. 빌린 재료로 없던 걸 만든 셈이죠.

알고 빌리자는 이야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합니다. 신화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원전을 쓰는지 20세기 창작을 쓰는지는 알고 쓰자는 것.

알면 비틀 수 있습니다. 다들 아는 이미지를 살짝 어긋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인물이 새로워지거든요. 반대로 모르고 쓰면, 남들이 이미 쓴 이미지를 한 번 더 쓰게 됩니다.

신화 계보 항목들을 만들면서 원전과 통설을 굳이 갈라 적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정확한 지식보다는, 무엇을 빌려 올지 고르는 데 쓰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