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한 주인공은 왜 잘 안 남나
오래 기억에 남는 주인공을 떠올려보면, 의외로 "가장 강한 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압도적인 주인공은 시원하지만 금방 잊혀요. 오히려 평범하게 시작한 사람이 더 오래 남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는 전사가 아니라 작은 호빗입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의 성진우는 가장 약한 헌터로 시작해요. 이야기가 굳이 약한 사람을 골라 큰 짐을 지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힘이 아니라 무게를 견디는 이야기
강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얼마나 세게 이기나"가 됩니다. 시원하지만 단순해요. 반면 약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이 짐을 견딜 수 있나"가 됩니다. 이게 훨씬 깊은 질문이에요.
프로도의 이야기가 위대한 건 그가 반지를 파괴해서가 아니라,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끝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반지는 강해질수록 더 무거워지는 짐이었어요.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이야기. 저는 이게 판타지가 도달한 가장 높은 지점 중 하나라고 봅니다. 후치와 프로도가 어떻게 갈렸는지는 따로 쓴 글에서 더 다뤘어요.
독자가 자기를 넣을 자리
평범한 주인공에게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독자가 자기를 넣을 자리가 생겨요. 처음부터 신적인 존재에게는 감정을 이입하기 어렵지만, 나처럼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조금씩 나아가는 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한 주인공의 성장은 독자의 성장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한 걸음 나아가면 나도 나아간 것 같고, 그가 무너질 뻔하면 나도 조마조마해요. 거리가 가까운 겁니다. 강한 주인공은 우러러보게 되지만, 약한 주인공은 함께 걷게 됩니다.
무협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흥미롭게도 무협은 이 지점이 조금 다릅니다. 무협의 주인공도 약하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약함은 "재능이 없다"기보다 "아직 쌓지 못했다"에 가까워요. 내공은 시간의 축적이니, 무협의 약함은 어리다는 뜻이지 무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협의 성장은 잠재력이 펼쳐지는 이야기가 되기 쉽고, 판타지의 약한 주인공은 한계를 안고 가는 이야기가 되기 쉬워요. 성진우처럼 약함에서 최강으로 가는 한국 웹소설의 주인공은, 무협의 "쌓으면 강해진다"와 판타지의 "평범한 자의 서사"를 절묘하게 섞은 지점에 있습니다.
약함이 선택을 무겁게 한다
약한 주인공의 가장 큰 힘은 선택에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 옳은 일은 쉬워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약한 자에게 옳은 일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그래서 약한 주인공이 옳은 선택을 할 때, 그 무게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나아가는 것, 도망칠 수 있는데 남는 것. 이건 힘이 아니라 용기의 이야기예요. 그리고 용기는 강함보다 훨씬 보편적입니다. 누구나 약하고, 누구나 두려우니까요.
가장 약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가장 멀리 간다
결국 우리가 평범한 주인공에게 끌리는 건, 그가 우리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닮은 사람이 자기보다 큰 것을 짊어지고 끝까지 가는 걸 보면,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가장 강한 주인공은 부러움을 주지만, 가장 평범한 주인공은 용기를 줍니다. 저는 그래서 오래된 판타지들이 하나같이 작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골랐다고 생각해요. 그게 이야기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